정지원형제_기독교개혁칼럼

최고관리자 1 4,200 2017.12.04 15:41
그 하늘의 권능권세권위로 말씀을 전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 바울은 실상 예수그리스도가 육신으로 오신 그 모습과 다를 것이 없는 예수의 씨요 예수의 분신이 되는 것이다.
이를 가장 잘 표현한 것이 예수의 실존이라는 말이다. 영생의 첫사람되시는 예수그리스도 그 자신은 아니지만
그분의 영을 받아서 실상 예수그리스도의 그 모습과 다를 것이 없는 주님의 분신이라는 놀라운 존재가 되는 것을 말한다.
그것은 마치 아버지가 안계셔도 그의 씨(DNA)가 자식으로 존재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우리가 예수그리스도의 분신이라면 우리가 어떤 존재인가 그 정체성이 명확해 진다. 더이상 죄과 사망에 매여 살며
온갖 고통속에 살던 예전의 모습이 아닌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디모데와 디도를 낳았다고 하는 것이다. 그들을 성경말씀이나 신학교리로 가르친 것이 아니라
낳았다고 하는 것은 그들에게 예수그리스도의 영 즉 성령을 분배하였기 때문이다.

사람은 먼저 자신이 어린아이를 벗고 성숙해야 자식을 낳을 수 있다.
그리고 자식을 낳은 다음에 학교교육이나 가정교육등 여러가지 살아가는 방식을 가르치게 된다.
마찮가지로 성도는 먼저 자신이 영적 어린아이를 벗고 성숙해야 영적인 자식을 낳을 수 있다.
그리고 먼저는 영적 자식을 낳은 다음에 성경말씀이나 신학교육이나 신앙훈련등등 여러가지를 가르쳐야 교육이 세상학문이나 의문이 안된다.
그래서 신학교육도 실상 먼저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인 것이 확실한지 살피고 신학생으로 입학시켜야 하는 것이다.

육신의 부모 자식의 원리에서도 자식이 태어나지도 않았는데 부모가 가르치겠다고 하면 그는 정신병자인 것과 같이
만약 이러한 회개와 성령받는 거듭남으로 영의 자식이 태어나지 않았는데 가르친다면 지식으로 머리만 커지는 자가 되어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서 역사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 세상의 학문처럼 의문이 되어 버린다.
다시말해서 가르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먼저는 그리스도의 영으로 낳아지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이다.
물론 율법이 몽학선생의 역할을 하는 기능으로써 가르치는 것은 예외이다.


그래서 바울처럼 첫열매이진 예수님을 증거할때는 먼저 자신이 성령을 받아 예수님의 씨가 된 후에 증인된
자기자신을 증거해야 하는 것이다.놀랍게도 예수님 자신을 전하는 것은 예수의 씨가 된 나 자신을 전하는 것을 통하여 이뤄진다.
이것이 하나님의 비밀스런 신비인 것이다.막연한 예수님을 전하면 그것은 이론과 자식이요 허상이 된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영을 받아 예수의 실체가 된 나 자신을 전하는 것은 이론이 아니라 실제 하나님의 능력이요 영광이 된다.

그러면 누가 그리스도의 영으로 낳아지는가?
그것은 먼저 그리스도의 영으로 낳아진 예수그리스도의 실존이 되는 스승을 알아보는 사람이다.
말씀을 듣는 자도 그 전하는 자가 예수의 실체요 분신인 것을 알아보는 영안이 있어야 한다.
회개하여 성령받아 거듭난 자 즉 작은예수되는 스승을 알아보는 영안이 열린자가 자신도 거듭날 수 있게 된다.
먼저 된자를 통하여 주님앞에서 자신의 더러운 죄를 고백(회개)하고 성령(그리스도의 영,복음의말씀)을 받아 자신도 거듭나게 되는 것이다.
거듭나게 되어 자신도 예수의 실존이요 분신 즉 작은 예수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울에게서 듣고 거듭난 디모데와 디도 그리고 디모데와 디도에게 또 생명을 분배받아 거듭날 수많은 사람들의
재생산의 원리이다. 결국 영원한 생명의 첫사람되시는 예수의 생명이 수없이 재생산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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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최고관리자 2017.12.06 15:39
BMC에 딱맞는 것이 신사도의 은사운동 말고 오늘날의 건전한 은사운동이라고 생각합니다.


< 오늘날에도 예언 방언 치유 축사등 기적의 은사들이 존재하는가? >

모든 것은 성경내용을 근거로 주장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고린도 전서를 읽고 올립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몸의 원리로 본다면 은사가 오늘날에도 존재한다고 하는 것은 합당하고 성경적입니다.
다만 일반은사가 아니라 기적의 은사도 존재하는가?하는 문제가 있는데 기적의 은사도 초대교회나 구약의 신비한 은사
(특별계시나 특별은사라는 용어의 차이로 구분하기 보다는 구약 신약이라고 명시하는 것이 낫다고 봅니다)와 같은 것이 아니라면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일반은사뿐 아니라 이러한 기적의 은사도 당연히 주님의 몸을 이루기 위하여 오늘날에도 더욱더 확실하게 존재합니다.
그러나 에베소서 4장11절의 일반은사를 고린도전서 12장10절의 특별은사로 섬기는 것이 아니면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설교든 전도든 찬양이든 특별은사로 하지 않으면 성령님이 역사하시는 은사가 아니기에 사람을 살리지 못하는 의문이 되고
인간의 학문이나 기술이 되어 버립니다.


다만 예언이나 계시를 직통계시로 여겨서 성경에 기록되었던 초대교회의 사도들이나 구약의 선지자들과 같은 동급으로 여기는 것이
매우 위험다는 우려는 맞는 말입니다. 그래서 은사운동이 지나친 신비와 기적으로 흘러가는 것은 경계해야 합니다.
바울 사도가 자기를 자랑하는 방언보다 차라리 예언을 하라고 하신것도 은사를 하기 앞서 먼저 사랑으로 하나되라고 경고하고 계신 것입니다.
사랑이 없는 은사는 귀신의 도구밖에 안되기 때문입니다.사랑과 성령의 복음을 근간으로 하지 않는 은사는
아무리 많은 일을 했어도 주님이 도무지 모른다고 하실수 있기 때문입니다.

신비한 은사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성경의 권위가 훼손된다는 우려뿐 아니라 목사만이 갖는 설교권같은 특권이
은사를 받은 평신도들에 의하여 훼손된다고 생각하여 위협을 느끼는 것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특별은사(신비한은사)를 부정하면 성령의 역사를 소멸시키는 결과가 됩니다.왜냐하면 은사는 교회를 위하여 성도를 도구로 하여 성령님이 하시는 역사이기 때문입니다.물론 아무리 은사라고 해도 먼저 거듭남이 전제되어야 합니다.거듭남이 없이 하는 은사가 성령이 아닌 귀신의 악령이 하는 사이비 은사가 됩니다.
거듭나서 성령받는 것이 먼저이고 그다음에 은사를 발휘하는 것이지 거듭나서 성령을 받고 하는 은사가 아니면 그것은 실상 귀신의 능력이라고 밖에 할수 없습니다.
사실 많은 교인들이 이부분은 균형잡기를 상당히 어려워합니다.은사주의자들은 거듭남에 대한 교리가 약하고 교리가 강한자들은 은사에 약합니다.
그러나 거듭남으로 사랑과 성령의 열매가 나타나는 것이 진정한 은사가 나타나는 길입니다.진정한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하는 은사가 바로 거듭나서 성령으로 하는 은사입니다.그러할때 나타나는 은사가 정말 거듭남의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즉 거듭남으로 사랑과 함께 은사가 나타나는 것이 진정한 은사이고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말하고자 했던 사랑과 은사의 내용입니다.

고린도전서 12~14장 특히 고전13장을 보면 은사는 부분적으로 했었으나 이제는 성령으로 전체적으로 분명하게 은사를 할수 있다고 하는 것으로 저는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은사도 결국 저 하늘나라에 가서는 모두 사라지고 사랑만이 남게 되기 때문에
이땅에서 예언과 방언과 기적 그리고 신유은사를 발휘한다고 해도 사랑으로 하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이해를 돕기 위하여 쉽게 구분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율법적 지식만 있는자->교권주의 율법주의 바리새인 /중생지식만 있는자-> 은사없는 교인
중생으로 성령받은자->사랑으로 성령의은사 성령의능력을 행하는 그리스도인 /중생없이 능력만 받은자->신비주의 은사주의 기독교무당


마 7:22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마 7:23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마 7:24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마 7:25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초를 반석 위에 놓은 연고요
(KJV흠정역)
마 7:22 그 날에 많은 사람들이 내게 이르기를,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대언하지 아니하였나이까? 주의 이름으로 마귀들을 내쫓지 아니하였나이까? 주의 이름으로 많은 놀라운 일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마 7:23 그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결코 알지 못하였노라.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너희는 내게서 떠나라, 하리라.
마 7:24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들을 듣고 그것들을 행하는 자를 나는 자기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과 같다 하리라.
마 7:25 비가 내리고 홍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되 그 집이 무너지지 아니하였나니 이는 그것을 반석 위에 세웠기 때문이라.


고린도전서와 에베소서의 몸의 원리를 우리가 이해한다면 은사진영의 기적이 지속된다는 주장과
개혁진영의 기적은 중지되었다는 주장은 서로 충돌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인간이기에 우리의 몸은 영과 혼과 육이라는 전인격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영과 혼과 육의 다양한 은사는 자기를 위한것보다 교회를 섬기기 위해서라도 개발되어야 합니다.
사람의 몸에서 손이나 발이 자기 기능을 하지 않고 사장된다고 생각해 보십시요.
얼마나 끔찍한 일이 일어나겠습니까! 사람이 눈의 기능만 있거나 귀의 기능만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요.
어쩔수 없이 장애가 있는 경우가 아닌 스스로 그렇게 장애를 자처하는 것은 결코 온전한 사람의 모습이 아닙니다.

이렇게 구분하는 것이 정확한지는 모르겠으나 예언사역으로 영이 건강해지고 방언과 기적으로 혼이 건강해지고 치유사역으로 육이 건강해지고
대략 이렇게 구분하면 이해가 쉽다고 생각됩니다.

그러므로 일반은사뿐 아니라 특별하고 신비한 은사도 오늘날에도 존재하는 것은 분명합니다. 다만 신약시대에 특별히 제자들과 바울에게 임했던
병고치는 기적과 주님말씀과 함께 제자들의 편지가 신약말씀이 된것과 방언했던 기적 기타기적 그리고 구약시대에 이스라엘의 역사와 선지자의 말이
하나님의 말씀과 함께 구약말씀이 된것과 병고치는 기적과 여러가지 기적등등 그러한 성경을 완성하기 위한 특별한 은사가
과연 오늘날에도 그대로 존재하는가?하는 문제입니다.
즉 구약과 초대교회 시대의 신유 예언 방언이 오늘날에도 그대로 존재하는가?하는 문제인데 제 생각은 하나님의 일하심을 선지자와 사도의 권위를
증거함으로 성경을 기록하기 위한 특별기적과 외국인에게 전도하기 위한 특별방언과(이것은 확실하지 않음)
성경과 동급의 계시의 대언과 구약선지가와 신약의 사도권을 증거하는 병치유의 기적은 오늘날은 중지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명심할 것은 오늘날도 삶속에서 이상의 내용을 위한 기적은 아니지만
적어도 자신의 개인적 믿음을 위한 것과 교회의 충만을 위한 신비한 기적은 오늘날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적도 있고 방언도 있고 계시도 있고 병고치는 기적도 있는 것입니다.
성경이 기록되던 특별한 시대의 특별계시 특별치유 특별방언 특별기적은 없지만 오늘날에 맞게 임하는 계시와 치유와 방언과 기적은 있습니다.

그러나 명심할 것은 이러한 계시와 방언과 신유를 주장하는 사람은 사랑으로 해야 하고 자신이 초대교회 사도 구약시대 선지자라도 되는 것처럼
교만하고 굴림하는 자세로 특별한 자라는 특권의식으로 이러한 것을 하는 것을 경계해야 합니다.
오늘날 이러한 것을 하는 사람들이 사도나 선지자의 위치에서 군림하는 자세로 이러한 것을 하기에 중지론이 나오는 겁니다.
선지자 사도들은 결코 굴림하거나 자기를 특별한 존재로 부각시키기 위하여 이러한 은사를  발휘한 것이 아닌데 오늘날 이러한 은사를 하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교만하고 목이 굳어 있기에 문제입니다.그래서 바울도 모든 은사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랑이라고 고린도 교회에 편지를 보내 강조한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이 문제는 기적의 은사가 오늘날에도 있으냐? 없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균형을 유지하느냐?아니면 급진적으로 치우쳐서
은사를 남용하거나 아예 은사를 부정하느냐?의 문제인 것입니다.

은사를 통하여 교회를 섬기는 것은 성령안에서의 참사랑이 각양 은사들이 하나되게 하는 역할을 한다고 보는 것이 바울의 고린도서의 은사부분의 주요내용입니다.
아무리 눈 코 입 귀의 은사가 있아도 사랑으로 은사가 서로 섬김으로 하나되지 못하면 몸을 이루지 못하고 괴물이 되는 것입니다.
각양 은사를 사모하되 하늘에서도 존재하는 사랑을 근간으로 서로 은사를 발휘해야 한다는 것이 고린도서의 은사부분에 요지입니다.
그리고 서로의 은사가 상대은사로 인하여 절제도 필요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그것이 사랑입니다.


고린도전서 14:26~27
그런즉 형제들아 어찌할꼬 너희가 모일 때에 각각 찬송시도 있으며 가르치는 말씀도 있으며 계시도 있으며 방언도 있으며 통역함도 있나니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 만일 누가 방언으로 말하거든 두 사람이나 다불과 세 사람이 차서를 따라 하고 한 사람이 통역할 것이요
고린도전서 14:32
예언하는 자들의 영이 예언하는 자들에게 제재를 받나니
(KJV흠정역)
고전 14:26~27 형제들아, 그런즉 어찌하리요? 너희가 다 같이 모일 때에 너희 각 사람에게 찬송시도 있고 교리도 있으며 타언어도 있고 계시도 있으며 통역도 있나니 모든 것을 남을 세우기 위하여 할지니라.만일 어떤 사람이 알지 못하는 언어로 말하거든 두 사람이나 많아야 세 사람이 순서대로 하고 한 사람은 통역할 것이요,
고전 14:32 대언자들의 영은 대언자들에게 통제를 받나니


야고보서 1:17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KJV흠정역)
약 1:17 모든 좋은 선물과 모든 완전한 선물은 위에서 빛들의 아버지로부터 내려오거니와 그분께는 변함도 없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느니라.


은사운동 진영과 오늘날 개혁진영이 서로 상대의 입장을 사랑으로 배려하고 사랑과 성령의 끈으로 하나가 된다면 소위 사적계시와 직통계시를 분별하여
서로를 이해하고 존중함으로 함께 영과 혼과 육이 균형을 맞춰서 마지막 때에 주님의 칭찬받는 빌라델비아 교회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2장4절에서 31절 중에서 10절 어떤 이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 이에게는 예언함을, 어떤 이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 이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 이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나니
(KJV흠정역) 10절 다른 사람에게는 기적들 행함을, 다른 사람에게는 대언함을, 다른 사람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 사람에게는 여러 종류의 타언어들을, 다른 사람에게는 타언어들 통역함을 주셨으나


에베소서 4장1절에서 16절 중에서 11절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KJV흠정역) 11절 그분께서 더러는 사도로 더러는 대언자로 더러는 복음 전도자로 더러는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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